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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여행

경기북부 가볼만한곳 (연천 호로고루)

by 비와몽 2021.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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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가을 부모님 모시고 갔던 연천 호로고루 

원래는 해바라기 꽃이 만개할때 가야 했는데 

어찌 어찌 하다보니 좀 늦어서 해바라기는 다 베어지고 없네요 

연천에서 군생활도 했고 나름 연천에 여러곳을 다녀봤는데 

이곳은 늦게 알게 되어 작년 가을에 잠깐 다녀왔네요 

다행히 사람들이 거의 없을때라 안전하게 구경하고 왔답니다 

올해는 좀 환경이 좋아져야 할텐데 ....그럼 늦여름 해바라기 꽃을 구경하러 GoGo.....

 

 

잠시나마 풍경을 보시고 힐링하시길 ...


정의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성곽. 사적.

개설
사적 제467호. 임진강 북안에 있는 연천 호로고루는 현무암 대지 위에 구축되어 있는 
삼각형 모양의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이다. 2001년 이후 4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하여 
견고하게 쌓은 성벽과 목책(木柵), 대형집수시설 및 각종 건물지가 조사되었으며, 
연화문 와당과 치미를 포함한 많은 양의 기와, 토기, 철기유물 등이 출토되어 
성곽의 구조와 함께 고구려 축성기술과 고구려의 생활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호로고루는 6세기 중엽 이후 약 200여 년간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하천(國境河川) 역할을 했던 임진강 유역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에 있고, 
상대적으로 위계가 높은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고구려 국경 방어사령부에 해당하는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입지 및 연혁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호로고루가 있는 고랑포 일대의 임진강을 호로하(瓠蘆河), 
또는 표하(瓢河)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호로고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670년 (현종11)에 
편찬된 『동국여지지』인데 ‘호로고루는 부의 동쪽 32리 호로탄 위에 있다. 그 동쪽은 적성현과의 
경계이며 두 개의 루(壘)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석벽으로 인하여 견고하다. 
전하기를 삼국시대 둔술처(屯戌處)라 한다’고 하였다. 임진강과 한탄강은 현무암대지를 침식하며 
흘러 강의 양쪽에 높이 10m가 넘는 수직 단애(斷崖)를 형성하고 있다. 이 수직단애는 자연장애물이자 
천혜의 요새를 구축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 주어 임진강과 한탄강은 6세기 중엽 이후 200여 년 
동안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하천 역할을 하여 왔다.

임진강 북안에는 주요 길목마다 고구려성이 구축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호로고루는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는 감조구간(減潮區間)이 상류에 위치하여 배를 타지 않고 임진강을 도강할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에 접하여 있어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한다.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호로하 부근에서 벌어진 고구려와 신라, 신라와 당나라의 전투기록이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 지역은 호로탄(瓠蘆灘)이라 하여 장단을 통해 개성으로 들어가는 주요 길목이었으며, 
호로고루에는 조선시대 중기까지 장단군의 치소(治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호로고루는 1991년문화재 연구소가 실시한 군사보호구역내의 문화유적 지표조사를 통하여 
고구려유적임이 알려지게 되었고, 2001년부터 토지주택박물관에 의한 4차에 걸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내용
발굴조사 결과 성벽 축성에는 토성과 석성을 결합한 독특한 토목기술이 적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고토양층인 지반을 평탄하게 조성하고 난 후 성벽 쌓을 구간을 1m 정도 높이로 판축해 쌓아올린 후 
성벽의 중간부분도 판축으로 너비 6m, 높이 10m 정도 쌓고 판축면 위에 석축으로 체성벽(體城壁)을 
쌓아올렸다. 체성벽 외면에는 암반에서부터 보축성벽을 쌓아 힘을 분산시키고, 보축성벽의 바깥에는 
다시 일정한 높이까지 흙으로 다져 보축성벽을 보강하였다.

이러한 구조의 축성방법은 당포성이나 은대리성에서도 확인되며,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의 성벽구조와 
평양 대성산성에서도 확인되는 고구려 토목기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토성의 장점과 석성의 장점을 
결합한 이러한 축성기법은 아차산3·4보루나 홍련봉1·2보루, 시루봉보루, 용마봉2보루, 무등리2보루 등 
산성에서도 확인된다. 발굴조사 결과 판축기법으로 뒷부분의 토축을 먼저 쌓고 두겹 정도의 석축을 
덧붙여서 쌓았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호로고루에 대한 최근의 조사에서는 보축성벽 안쪽에서 정연하게 쌓은 체성벽과 체성벽 안쪽에서 
기둥홈이 있는 내성벽(內城壁)이 확인되었다. 대성산성과 당포성에서도 확인된 바 있는 기둥홈의 기능에 
대하여 그동안 수압조절목적이라거나 무기 거치목적 등 여러 가지 견해가 제기되었으나 호로고루 발굴을 
통하여 이러한 기둥홈은 석축성벽의 축성공정(築城工程)과 관련된 구조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즉 기저부 판축토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목주를 세우고 구획을 한 다음 그 안에 석재를 채움으로써 
견고하고 효율적으로 성벽을 구축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로고루 내부의 토층상은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화산폭발로 철원‧평강지역에서부터 흘러내린 용암이 
기반암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 현무암 쇄설물과 함께 고토양층이 1∼3m 두께로 덮여 있다. 
이 고토양층(古土壤層)에서는 구석기 유물이 주로 발견되는데 지역에 따라 황색이나 초콜릿색을 띠기도
하며 비교적 균일하게 토양쐐기가 발달해 있다. 호로고루 내부의 각종 유구는 현무암반 위에 퇴적된 
고토양층을 파거나 성토하여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시굴조사 결과 목책유구, 지상건물지, 
대형집수시설, 우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목책(木柵)은 동벽이 구축되기 전 이곳에 처음 방어시설을 구축했던 고구려군에 의하여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목책이 조성될 당시에는 호로고루 내부가 지금처럼 평탄하지 않았으므로 
자연지형을 따라 목책을 세웠으며 목책 내부에는 초병들의 숙소로 사용된 토광이 있다.

이후 성내부에 대한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시행하여 목책을 제거하고 성내부를 성토하여 평탄하게 
조성한 후 지상건물을 조성하였다. 동벽은 이 지상건물을 구축할 당시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상건물의 전체규모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잔돌로 적심을 놓고 그 위에 초석을 올려 놓았으며, 
지붕에는 기와를 얹었다. 성내부에는 난방과 취사를 위하여 ‘ך’자 형태의 온돌시설이 구축되었다.

집수시설은 고토양층인 생토면을 3m 깊이로 파고 가로 세로 6m 정도의 규모로 석축을 하여 
집수시설로 활용하였으나 이후 집수시설 바닥에 통나무를 깔고 두께 1m 정도로 잔가지나 
갈대와 점토를 깔아 방수처리를 하고 온돌을 설치된 건물로 재활용하였다.

집수시설 옆에서는 우물이 있는데 암반까지 생토층을 파고 바닥에는 통나무로 결구하여 네모나게 
받치고 그 위에 할석을 쌓아 올라간 구조인데 물이 솟아나는 샘이 아니기 때문에 지표수 등을 모아서 
활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다양한 크기의 수혈유구와 건물지 유구가 발굴되었다.

호로고루에서는 토기와 기와류, 석기, 철기 등 다양한 고구려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기와이다. 고대사회에서 기와는 매우 귀한 건축자재였기 때문에 왕궁이나 
사찰, 관아, 학교 등 공공건물에만 사용되었는데 기와가 이처럼 많이 출토된다는 것은 호로고루가 
기능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이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기와는 대부분 붉은색이나 황갈색을 띠고 있으며, 표면에 노끈문이나 톱날문, 격자문, 사격자문, 
횡선문 등 다양한 문양이 찍혀 있고, 좁은 판자로 만든 와통을 사용하여 내면에 통쪽 모양의 모골흔이 
요철을 이루며 찍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호로고루에서는 볼륨감이 있는 6엽의 연화문 와당과 와당을 
부착했던 수키와가 여러 점 확인되었으며, 용마루끝을 장식했던 치미편도 수십점이 확인되었다. 
그 외에도 착고기와나 건물 바닥에 깔았던 전돌 등이 발견되어 호로고루에는 수준 높은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와류 이외의 유물로는 남성용 소변기인 호자(虎子)를 비롯하여, ‘상고(相鼓)’라는 명문이 새겨진 고구려 악기
가로손잡이가 달린 동이류와 접시, 시루, 저울추, 세 개의 다리가 달린 벼루도 출토되어 각종 문자가 새겨진 
토기류와 함께 이곳에 주둔했던 고구려군의 문화수준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그 외에도 고구려병사들의 식생활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각종 탄화곡물이 출토되었는데, 쌀과 좁쌀, 
콩, 팥 등이 확인되었다. 육류로는 소․말․개․멧돼지․사슴․노루 등 다양한 동물의 뼈가 다량으로 출토되어 
최소한 6종 이상의 동물이 식용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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